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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래빗

화랑로를 걷던 기억

최종 수정일: 2023년 11월 10일

화랑유원지 - 초지동 - 원곡동의 화랑로

나므

사진∙그림 래빗


이언정, <화랑로_과거와 현재>, 30x42cm, 2023


날씨가 제법 덥다. 그 탓인지 최근 영 맥을 못 추던 우리집 고양이가 자꾸 토를 해서 걱정스러운 마음에 얼마 전에 동생과 함께 원곡동에 있는 동물병원을 수소문하여 찾아가게 되었다.

4호선을 따라 가다가 초지역 앞 지하차도를 지난 후 원선1로를 따라 우회전을 하니 곧이어 화랑로와 교차하는 사거리가 펼쳐졌다. 학창 시절을 이 동네에서 보냈던 나와 동생은 눈에 익지 않은 풍경에 자꾸 창문 밖을 두리번거렸다. 40층 가까이 되는 아파트 숲 사이로 시원스레 펼쳐진 왕복 6차로를 달리니 더위로 갑갑했던 마음이 뻥 뚫리는 듯 했지만 내 기억과는 다른 이미지가 너무도 낯설어 당황스럽기도 했다. 오로지 시민 시장과 라성 호텔 만이 기억의 이정표가 되어 서 있었다.


현재의 라성 호텔 앞 (2023년 2월, 출처: 네이버 지도 파노라마)
과거 라성 호텔 앞 (2010년 4월, 출처: 네이버 지도 파노라마)

병원을 들린 후 동생과 나는 잠시 동네를 걸어보기로 했다. 새 보도블럭이 깔린 드넓은 인도를 따라 가운데에 심어있는 잔디와 관목이 푸르렀고, 군데군데 있는 벤치는 걷다가 잠시 앉아 튤립이나 민들레 조형물을 감상하는 여유를 불러 일으켰다. 그렇게 천천히 동네 구경을 하며 화랑유원지 방향으로 화랑로를 걷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아파트나 상가 간판 따위를 보면서 연신 내 기억 속 모습과 틀린 그림 찾기를 했다. ‘삼천리 자전거’처럼 그 때 그 자리에 있었던 가게의 간판이 보이면 아는 사람의 가게를 만난 것처럼 괜히 반가웠다. 그 놀이는 어색하면서도 그립고 서운하면서도 즐거웠다.

화랑로 민들레 조형물이 있는 거리 (2022년 8월, 출처: 네이버 지도 파노라마)

학창 시절, 중앙동에서 학원 수업이 끝나고 괜스레 걸어서 집으로 가고 싶던 날들이 있었다. 이어폰으로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할 수 있는 가장 느린 걸음으로 화랑 유원지의 넓고 잘 가꾸어진 모습을 즐기며 걸었다. 그러다 초지운동장 사거리의 횡단보도를 건너 녹슨 철제 울타리와 곧 무너질 것처럼 금이 간 담벼락이 가득한 빌라 단지에 접어들면 나도 모르게 걸음이 조금씩 빨라졌다. 철거가 예정되어 있기에 더 이상 고칠 이유가 없는 반쯤 무너진 담벼락 옆을 지나가며 사람을 잃고 유령이 되어버린 모습이 정말 초라하고 작다고 느껴졌다. 무더운 여름날 아직 해가 길어서 8시가 다 되어가는 데도 하늘은 아직 흑빛이 아닌 오렌지빛과 보랏빛 그라데이션을 이루고 있을 무렵, 내가 보는 화랑로 또한 그렇게 같은 그라데이션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했다.


과거 초지동의 화랑로 (2010년 4월, 출처: 네이버 지도 파노라마)

그 때 그렇게 작다고 생각했던 길이 이제는 이렇게 커지다니. 그리고 그 때 그렇게 초라해서 얼른 지나가고 싶었던 길이 자꾸 떠오르다니. 오랜 시간 내 머리의 작은 구석도 차지한 적 없다고 생각했던 장소가 예기치 못하게 이렇게 떠오르게 된 건, 지금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정표와 옛 기억과 비교할 만한 새 건물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여유로운 거리가 된 화랑로를 보며 무의식에 잠겨 있던 기억이 새로이 오렌지색이 칠해졌다. 새롭게 색이 입혀진 이 기억은 이제 때때로 꺼내보게 될 것 같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이제는 과거와는 달리 화랑로를 따라 원곡동 거리를 벗어나면서 생각했다. 조만간 다시 한 번 들려야겠다고.


현재 초지동에서 진입하는 화랑로 (2021년 11월 출처: 네이버 지도 파노라마)
과거 초지동에서 진입하는 화랑로 (2010년 4월 출처: 네이버 지도 파노라마)


에디터: 나므



* 과거 화랑로의 모습을 소개하기 위해 네이버 지도 파노라마 사진을 본문에 사용하였습니다.


기억 속에 존재하는 화랑로의 과거와 현재를 하나의 풍경으로 그렸습니다.

작가의 상상 속에서 재탄생한 화랑로는 현재의 깨끗하고 높은 건물들과 정감 있는 작은 연립이 함께 섞여 있는 모습입니다. 과거와 현재를 기억하고 이어보는 작업을 통해 새로운 풍경을 찾아보려 합니다.


채널 안산에 실린 그림·글·사진 등 모든 자료는 작가와 에디터에게 저작권이 있음으로 서면 동의 없이 어떤 경우에도 사용을 금합니다.


 
‘화랑로’

주소: 경기 안산시 단원구 원곡동 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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